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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암주논개생장향수명비
  • 내용
  •  

    위치 : 의암사 경내

    생장향 수명비는 1844(헌종 10) 이 고장에 부임한 정주석(?) 현감에 의하여 1846년에 세워진 것이며, 논개는 임진왜란의 국란에 처하여 남편 최경회 의병장 따라 진주성 싸움에 동참하였다, 성을 둘러싼 왜적과 아흐레 동안이나 대적 치열한 공방 싸움을 거듭하다, 왜군에 중과부적과 조총이라는 신무기에 밀리어 성이 무너지고 성안의 육만 여명의 군관민이 몰살을 당하고 성을 지키던 남편 최경회는 성을 지키지 못한 책임을 지고 김천일 고종후와 같이 촉석루에 올라 북향 사배를 한 다음 절명하며 남긴 시인

     

    촉석루 위 삼 장사

    술 한 잔을 들고

    웃으며 긴 강물을 가리키노라.

      

    긴 강물 도도히 흘러가노니

    그 물결 마르지 않은 한

    나라 사랑 혼도 사라지지 않으리.

    라는 시 한 수를 남기고 남강에 투신 순절하였다.

       

    논개는 호남을 지키는 마지막 보루인 진주성도 무너지고 하늘 같이 믿었던 남편마저 순절하였으니, 오갈 길 막힌 사고무친의 처참하고 고독한 처지인 적진에서 구차하게 살아남기보다는 차라리 의롭게 죽음을 택함이 나으리라 생각하여, 나라와 남편의 원수를 갚기 위하여 비장한 각오로 왜군의 칠월칠석날 전승연 잔치에 기생으로 가장하여 참석 왜장 모곡촌육조(毛谷村六助)”를 남강 위암으로 유인 강하게 낚아채어 수장시키고 순국한 거룩한 죽음을 택한 것이다.

    이 비신은 높이 250에 가로 50세로 30에 갓 두겁을 씌워진 육중한 무게를 느끼게 하며 비신을 풍우로부터 보호하기 위하여 높이 6m에 가로 2.5m 세로 2.5m인 아담한 비각에 감싸여 있다.

       

    이 비석의 비문은 전면에 촉석 의기 논개 생장향 수명비라 새겨져 있고

    뒷면의 비문을 보면

      

    질풍이 몰아치듯 국난을 당하였음에도 구차하게 살려고도 하지 않고 절개를 굽히지도 않은 것은 열사라도 어려운 일인데 한갓 여자의 몸으로 대의를 판단하여 죽음을 보기를 마치 집으로 돌아가듯 하였으니 그 어찌 열렬하지 아니한가.

    그 당일을 생각해 보건대 그 늠름한 열기가 해와 별같이 빛났으니 그 어찌 장엄하다 아닐 손가.

    산에는 영스러운 버섯이 있고 물에는 맛좋은 샘이 있으니 군자라도 칭찬을 하거늘, 항차 사람의 이름과 절개가 천성에 근원 하여 사람의 이목에까지 퍼져 있음이랴, 부끄럽게도 나는 육순의 보잘것없는 선비로써 끝내 나라를 위하여 큰 공을 이룸이 없음으로 매양 이 사람같이 의렬의 큰 공을 세운 이에게 삼가 옷깃을 여미고 공경하고 언제나 감동 감개 하였다. 이제 의기의 수명을 전하니 이후 그녀의 늘 영향을 따르기를 원하며,

    삼가 글로 적노라.”

    숭정 기원후 사병오 계추상한

    지현 서원 정주석 근식

    자 유학 기영 근서

    비 유사 밀성 박길인

      

    이 비석은 대단히 육중한 단단한 화강석으로 다듬어져 있으며 그 비 문 역시 명문장으로, 논개의 살신성인의 위대한 정신을 함축 작성하였음을 엿 볼 수가 있다. 이 수명비가 세워지기 이전만 하여도 논개가 장수 태생이라는 사실을 아는 이가 별로 없었다,

    단지 어린 시절 일제의 시퍼런 칼날 같은 식민지 학정아래에서도 우리들의 어머니들이 들일을 하시면서 숨어서 들려주시던

    진주기생 이애미(의암)는 우리나라 구하려고 왜장 청정 목을 안고 진주 남강에 몸 던졌네.......” 라는 막연하게 민요가락으로 불리어 내려오고 있음을 희미하게 알고 있을 따름이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장수출신이라고 거론하기 시작 된 것은 논개가 진주 남강에서 왜장을 끌어한고 순국한 후 이백 여 년 동안 구전으로 논개는 전북 장수 장계 주촌 출생이라고 꾸준히 전하여 내려오던 것이 1800년대에 들어와 호남절의록(湖南節義錄)에 기록되기 시작했다. 호남절의록은 55책으로 되어 있는데 순조(純祖) 즉위년인 서기 1800년에 간행되었다. 이 호남절의록 권지 일 하 33면에 임진의적(壬辰義蹟) 충의공 일휴당 최경회 사실편을 보면 다음과 같이 기록이 되어 있다.

       

    기생 논개는 장수사람으로 공이 사랑하였다. 공을 따라 진주성으로 들어갔다. 성이 함락되매 자기 몸을 잘 꾸미어 적장을 유인 끌어안고 남강의 위태로운 바위 위에 둘이서 마주하여 춤을 추다가 두 손으로 적장을 끌어안고 수장 순절하였다. 뒷사람들은 그 바위에 새겨 놓기를 의암(義巖)’이라 하였으며 비를 세웠다.”

    수명비의 수난

    논개가 최초로 장수인 이라고 기록된 문건에 의하여 정주석 현감이 그대로 둘 수가 없어 호남절의록에 등재된 장수삼절인 논개수명비와 목숨을 걸고 장수향교를 지킨 충복 정경손의 수명비를 향교 입구에 같이 세운 것이다.

    논개수명비가 최초로 세워진 위치는 장수읍 장수리 277번지고 이의종씨 댁 입구였으며 당시 이곳은 옥거리[獄衙]”라 부르는 곳인데, 장터입구여서 많은 이들이 장에 드나들며 만인의 마음에 거울이 되게 하기 위하여 이곳에 1896년까지 96년간 세워져 있었다.

    그 후 수명비는 시장 확장을 하기 위하여 장수읍 장수리 현 장수교육청 사거리 들길 옆에 옮겨 세워졌다. 논개생장향수명비가 이 자리에 세워지면서 동네 이름도 그 비석을 중심으로 하여 가운데 담을 중비, 비석 아래쪽 담은 하비, 비석 위쪽 동네를 상비라고 이름이 붙이어져서 지금까지도 동네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일제는 1905년 을사능약을 강제로 체결하고 1910년에 기어이 야만의 마수로 한일합병이라는 이름하에 일제는 강점을 하고 말았다.

    일제는 우리나라를 강점 후 계속하여 착취와 압박을 가해오다 드디어 1939년에 당시 총독이었던 남차랑이 한국민족말살정책으로 조선민사령을 발동시키어 내선일체의 구호를 내걸고 우리민족의 외자 성씨를 일본식 두자 성씨로 고치게 하는 소위 창씨령을 내리어 강압적으로 전 국민에게 일본식 성과 말을 만들어 쓰도록 강요하였다. 그런가하면 우리의 고유의 전통적인 글과 말을 폐지시키고 일본식 말과 글을 상용하도록 하였으며 오천 년을 내려오는 우리의 전통적인 역사와 문화마저 파괴 말살하여 영원히 일제화 시키려 가진 만행을 감행하였다.

    전국에 282개소에 소위 일제가 말한 일본의 창시조 천조대신을 섬기는 소위 대형 신사당을 지어놓고 신사참배와 일본천황이 있는 동방예배를 조석으로 강요를 하기도 하고 집집마다 천조대신의 30×10×5정도 되는 신전[귀신단지]을 만들어 강매를 하고 그를 벽에 걸어놓고 조석으로 참배를 하도록 강압하였다.

    일제의 이 같은 포악무도한 와중에 임진왜란당시 일제에 가장 치명적인 복수와 타격을 감행한 논개의 수명비를 그대로 묵인해 둘리가 없었다. 194211월 캄캄한 그믐밤을 기하여 장수읍 장수리에 사는 정모라는 사람을 시키어 다음 5명을 지명했다.

    이재영. 박수옥. 강홍길. 이이석. 서순영.

    장정 다섯 명을 19421130일 밤12시에 정과 큰메와 삽과 괭이 등을 준비하여 경찰서 앞으로 모이게 하였다. 당시 장수경찰서 고등계에 근무하고 있던 한국인 서모라는 형사와 일본인 다야마 라는 순사부장이 나와 앞장서며 오라 하였다. 따라 가보니 논개수명비 앞에 이르러 다섯 명을 세워놓고, 다야마 부장이 엄하게 지시를 하였다.

    이 비는 일본으로는 원수의 비석이다. 이 비석 때문에 앞으로 내선일체 국체에 방해가 되어서는 안 되니까 이대로 둘 수가 없다. 남차랑 총독의 특명이니 이 밤이 새기 전에 이 비각을 헐어 멀리 갔다 불태워 버리고, 비석은 부숴 땅속 깊이 묻어버리라하였다.

    다섯 장정은 어쩔 수 없이 비각에 손을 대려하니 멀쩡하던 날씨가 갑자기 흐려지고 광풍이 불며 진눈깨비가 몰아치기 시작하였다. 작업을 감독하던 두 경찰은 자기들끼리 무어라 주고받더니 우리가 내일 아침에 일찍이 나 올 터이니 그 때까지 무슨 일이 있어도 흔적 없이 작업을 마치어야지 그렇지 못 할 적엔 처벌을 한다고 협박을 하고 사라졌다.

    그들이 가고 나서 다섯 사람은 상의를 하였다. 비석을 파괴하자니 한국 사람으로서 양심의 가책이 되고, 그대로 방치하면 일본경찰에게 처벌을 받을 것이니 어떻게 하면 좋을 가를 궁리하다, 결국 비석은 날이 새기 전에 멀리 운반하여 밭에 묻어버리고 그들에게는 부수어 묻었다 하고 비각은 부수어 멀리 노하리 숲 밑에 갖다 태워버리기로 의견을 모으고 그대로 작업을 끝내고 아침에 나타난 그들에게는 지시대로 처리하였다고 말하고 돌아갔다.

    비석을 묻은 자리는 천우신조로 눈이 내리어 덮어 흔적도 없이 숨겨졌다.

    1941년 일본은 이태리. 독일과 동맹을 맺고 중국을 공격, 중국의 동남쪽의 요충지를 점령하며 남진정책을 실시하다 하와이 진주만을 기습, 태평양전쟁을 일으키면서 미국이 전쟁에 개입되었다. 그러나 일본은 미드웨이 해전으로 일본해군은 거의 전멸되고, 1944년까지 피점령 지역 대부분을 탈환되었으며, 1945년 미군이 일본의 히로시마”, “나가사끼에 원자탄 투하로 일제는 패전하였고, 우리는 36년의 일제의 질곡에서 광복되었다.

    일제의 압박과 서러움에서 시달리던 우리민족은 손에 손에 태극기를 들고 대한 독립만세를 목청껏 외쳤으며 우리고유의 풍물을 앞세우고 기쁨의 시위를 하였다. 군중은 맨 먼저 일제의 소위 신사당이라 부르던 신단을 부수어 일본인들의 면전에서 불살라버리고 통쾌한 보복을 하였다.

    장수초등학교 교정의 고학년 학생 몇 명이 교정 동편에 세워져 있던 소위 대마전이라 부르던 괴물을 넘어트리며 불 질러 태워버리고 논개 비 캐러 가자고 소리쳤다.

    그들은 집에 돌아가 삽과 괭이 등 농기구를 들고 나와, 논개 수명비가 묻혀 있는 장소로 몰려가 땅을 파고 비석을 캐냈다. 인근에서 이를 지켜보던 어른들도 같이 달려들어 캐내고, 비석에 묻어 있던 흙을 씻어 냈다. 비석이 수난 당한지 210개월 만에 다시 햇빛을 보게 되었다.

      

    당시 비석 발굴에 앞장섰던 학생들은 다음과 같다고 한다.

      

    장수리 거주 박옥길, 천기창, 이갑선, 김진옥, 한순태, 김판천

    노하리 거주 박세민, 최일엽

    노곡리 거주 이영조, 백영선

    무주군 거주 김병열

    전주거주 오봉수

    이들은 학교공부를 하면서 선생님으로부터 우리는 일본사람이 아니고, 조선으로서 나라와 민족과 역사와 글과 말이 엄연히 따로 있는데, 일제에 의하여 침략을 당하고 있다는 가르침을 받아왔다. 아울러 일제로부터 나라를 구한 훌륭한 논개의 비석이 있었는데 일경에 의하여 묻혀버렸다는 이야기와 장소를 미리 들은 적이 있어 빨리 발굴될 수 있었다. 장수사람의 지혜가 소중한 의리를 살려 낸 쾌거였다.

    그 당시 전국 각지에 산재한 일제와 관계된 유적과 비석이 산재하였는데 모두가 파괴되었으며, 심지어 주촌에 있던 논개의 선조 묘비 역시 산산조각으로 파괴하여 여기저기 흩어져 버렸음을 알고 있다.

    또한 전북 남원군 운봉면에 있던 이태조 이성계가 아지발도를 무찌르고 그 자리에 세워진 황산대첩비도 당시에 파괴되었으며, 충남 금산에 있던 칠백의총의 비석, 남원의 만인의총의 비석도 같은 시기에 파괴를 당하여 흔적도 없는데 그나마 황산대첩비는 부서진 것을 그대로 맞추어 복원하고 있어 일제의 만행을 두고두고 되새길 수가 있다.

    이를 미루어 볼 때 논개수명비는 그 난리를 용케도 피하였으니, 절의의 고장 후예로서 이를 지킨 우리 장수군민이 자랑스럽지 않을 수 없다.

    당시 비석이 땅에서 캐어나자 지켜보던 부인들도 달려들어 물로 깨끗하게 씻었다고 하는데 그분들이 장수리 거주하던 김예분. 정복남. 김점순. 황정양제씨 등이었다. 그 외에 몇 분이 더 있었다는데 이름을 알 길이 없어 안타깝기만 하다.

    논개수명비는 1942년 매장 되었다가 1945815일 광복이 되면서 820일 발굴이 되었으며, 장수군민들은 비로소 제대로 된 비각을 짓고 비를 세워야한다는 의견의 일치를 보았고, 821일에는 누구의 명령이나 지시도 없이 군민 다수가 비석 앞에 모였다.

    이때에 60세쯤 되시는 건장한 노인 두 분이 군중을 지휘하며 비각을 어디에 어떻게 만들며 세워야 할 것인가를 지휘를 하는데, 계남에 사셨던 오일성선생과 장수에 사셨던 이재순 선생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이 두 분의 지시에 의하여 각기 수명비각 복원과 비를 세우는 작업을 분담하여 일사분란하게 움직였다. 장수읍 장수리, 장계로 가는 19번 국도변(현재 장수교육청 위쪽 관주산 자락)에다 터를 다듬고 목수 5-6명은 관주산에 올라 비각을 세울 재목을 내며, 한편은 이를 운반하여 다듬고 한쪽에서는 비를 운반하여 세우기 시작했다. 비각을 짓는 것은 수대목 최동엽씨가 책임을 지고 주도하였는데, 모두가 자발적으로 동참하여 작업을 시작한지 수 일 만에 훌륭한 비각과 비석을 세우게 되었으며 모두가 기뻐, 한바탕 잔치가 벌어지기도 하였다.

    논개수명비의 복원은 누구의 지시나 대가를 바라고 하는 일이 아니고, 군민 모두가 자발적으로 발로였기 때문에 그 과정과 결과가 더욱 값지고 소중하다.

    이 비는 그 후 1955년 장수리 남동마을 회관 옆에 이전하였다가 1974년 현 의암사로 이전 보존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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