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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구야담(靑邱野談)≫
작성자
미상(조선말기추정)
작성일
2014.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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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구야담(靑邱野談)≫
‘진양성의기사생(晋陽城義妓捨生)’

논개(論介)는 진양(晋陽) 땅의 기생(妓生)이다. 임진년(壬辰年) 왜적(倭賊)이 진양성(晋陽城)을 공격(攻擊) 할 때 상락군(上洛君) 김시민(金時敏)이 성문을 굳게 닫고 직접 지키며 여러번 싸워 여러 번 패퇴(敗退)시켜 왜적 수만명을 죽였다. 적들은 결국 호남(湖南)을 넘보지 못하고 돌아갔다. 다음 해 계사년(癸巳年) 6월(六月) 왜장(倭將)청정(淸正)이 풍신수길(豊臣水吉)의 명을 받고 진양성에서의 치욕(恥辱)을 씻고자 십만(十萬) 병사를 이끌고 와서 포위(包圍)하였다. 이 때 경상도병사(慶尙道兵使) 최경회(崔慶會)와 충청(忠淸兵使) 황진(黃進)과 창의사(倡義使) 김천일(金千鎰)과 김해부사(金海府使) 이종인(李宗仁)과 복수장(復讐將) 고종후(高從厚)와 사천현감(泗川縣監) 장윤(張潤) 등 여러 공(公)들이 들어와 성을 지켰다. 유독 홍의장군(紅衣將軍) 곽재우(郭再祐)는 ‘이 성은 왜적이 힘을 다해 싸울려는 곳이오, 호남과 영남(嶺南)의 요충(要衝)과 관문(關門)이 되는 곳으로서 고단한 병력으로 강적(强賊)을 대항(對抗)하면 반드시 패할 것이다.’고 하여 끝내 성 안으로 들어오지 않았다. 여러 공들이 촉석루에 모여 생사(生死)를 같이 할 것을 맹세하고 비분강개(悲憤慷慨)히 일을 의논하였다. 왜군에서는 아래에 명을 내리기를 ‘작년(昨年)에 패퇴한 보답을 오늘에야 할 것이다. 이 성을 함멸(陷滅)시키지 못하면 돌아가지 않을 것을 맹세한다.’고 했다.
그리하여 (왜적은) 백방(百方)으로 공격을 했는데 10일만에 성을 함락되고 말았다. 성 안 6만의 사람이 같은 날에 죽었고 여러 공들은 모두 남강에 이르러 죽었다. 이 때 논개는 화장(化粧)을 하고 옷을 갖추어 입고서 왜장 가운데 가장 걸출(傑出)하게 생긴 자를 찾아 만나고 거짓으로 교태(嬌態)를 부리니 왜장이 기뻐했다. 그가 그녀를 겁탈(劫奪)코자 했으나 그녀는 허락치 않고 부드러운 말로 왜장을 유인(誘引)하여 강 가의 바위 위로 걸어나오게 했다. 그 곳에서 함께 춤을 추었는데 이 바위는 강 가에 우뚝 솟아 있어 삼면(三面)이 모두 깊은 못이었다. 그래서 왜장의 허리를 안고 강물로 떨어져 들어갔다. 왜군의 진영(陣營)에서는 크게 놀랐다. 난이 평정(平靜)된 뒤 논개를 기려 ‘의기(義妓)’라 하고 강 가에 사당(祠堂)을 세워 제(祭)를 지내고 그 바위를 ‘의기암(義妓巖)’이라 이름하여 ‘일대장강(一帶長江) 천추의열(千秋義烈)’이라는 여덟 글자를 새겨 두었다. 그 바위를 또한 ‘낙화암(落花巖)’이라고도 하는데 대개 기녀가 강에 가라앉은 것을 낙화(落花)에 비유(比喩)한 것이라 한다.

論介者晋陽妓也. 壬辰倭攻晋陽城 上洛君金時敏嬰城自守 屢戰屢敗之殺倭數萬 賊終不敢窺湖南而歸 翌年癸巳六月倭酋淸正承秀吉之旨 必欲雪晋陽之恥 率兵十萬來圍時本道兵史崔慶會 忠淸兵史黃進 倡義使金千鎰 金海府使李宗仁 復讐將 高從厚 泗川縣監張潤諸公入守之 獨紅衣將軍郭再祐曰 此城倭賊必爭之地也. 爲湖嶺要衝關隘(阨)之所 而孤軍遇强賊 必敗乃已云. 而終不入城 諸公會矗石樓 誓同生死慷慨論事 倭下令曰 昨年敗衄之報 政在今日 不滅此城誓不旋踵 百道攻城第十餘日城陷城中六萬人 同日殲之 諸公眥扶南江而死 時論介凝粧盛飾 往見倭將之最傑鷲者 假意獻媚 倭將悅之欲劫之 妓不從 以婉辭誘引倭將 步出江邊巖石上 與之對舞 此巖揷在江岸三面皆深潭也. 遂抱倭將之腰 墜入江中 倭陣大驚 亂平後 旌論介曰義妓 立祠江上祭之 名其石曰義妓巖 刻一帶長江千秋義烈八字 其巖亦名落花巖 盖以妓之沈江 譬之落花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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