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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개 소개
논개 유적지
논개 유적지 장수지역
의암 주논개 생가지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4.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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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
장수군 장계면 의암로 558
면적
면적 67.460㎡
정화사업비
6,550백만원
준공
2000. 9. 29
주논개는 1574년 9월 3일(甲戌年, 甲戌月, 甲戌日, 甲戌時)의 4갑술의 특이한 사주를 가지고 이곳 주촌마을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냈다.
당시 마을은 대곡제 축조로 수몰되고 남아 있는 당산 옆에 생가만 복원되었다가 다시 1996~2000년도에 2만여평의 부지에 확장 정화하였으며 생가지의 경내 시설로는 의랑루, 연못, 단아정, 주논개 동상, 기념관, 생가가 있다.
경내둘러보기

의암주논개 생가와 기념관 전경

논개생가

본채와 헛간, 우물 등이 있다.

논개부모묘

좌:최경희장군 추모비, 우:의암 주논개 불망비

논개기념관

현판글씨는 서예가 삼민 이용 글씨

논개동상

연지와 단아정

의랑루(義娘樓)

현판글씨는 서예가 하석 박원규 글씨




논개 생가지 경내 각종 비문 碑文

의암 주논개 랑 생장지 사적지 불망비

선조 25년 임진왜란때 진주성에서 왜장 게야무라로쿠스케를 죽이고 순국한 의암주논개의 생장지를 기념하기 위하여 1960년 장수군민의 정성으로 건립 하였다. 당초에는 주촌마을 입구에 있었으나 대곡제 축조로 1997년 생가지 장소로 이건하였다. 의암주논개의 생애가 간략하게 기록되어 있으며 측면 모두 1칸의 보호각이 세워져 있다.

비문내용 의암의 부친 신안(新安) 주달문(朱達文)은 본향 계내면 동남방 백화산 북록 산자수명한 승지를 택하여 모옥을 결구하고 산수의 낙과 한학을 숭고하니 사방인사 부급종사하야 소거(所居) 수년에 일촌을 가성하니 세인이 주 선생의 촌이라 칭하야 주촌이라 하다. 선조 7년 갑술 9월에 일녀를 탄생하매 선생이 애지하야 사주를 기록하니 사갑술이라 즉석에서 산(産 : 논) 구(狗 : 개)의 천명 으로 한자 논개(論介)라 명명하였다. 18세 신묘 춘에 본 현감 최경회는 경상우 병사로 진주에 부임 수행하였다.
계사 6월에 왜적의 침입으로 진주성이 함락되어 제장이 전몰하니 성중이 어 육이라 7월 7일 촉석루와 남강상에 왜적의 전승연(戰勝宴)이 낭적(狼籍)하매 강개분의하야 자천위기(自薦為技)하고 왜장 모곡촌육조(毛谷村六助)의 니취난 광(泥辭亂狂)함을 기회로 장재(壯哉)라 예비 된 10지의 지환(指環)과 만장(萬丈)의 열기로 남강 심류에 견포 수락하여 만고불구의 대의를 수립함을 항가에 구가 영전할 귀감으로 자에 입석 기념하였다.

단기 4293년 12월 장수교육감 김상근 근립
장천인 이재순 근기
성주인 이상렬 근서

의암 주논개 유허비

이곳은 임진왜란 당시 나라에 충성을 다한 논개의 출생지이다. 논개의 성은 주씨이고 호는 의암이며 의암이라는 호는 그녀가 순국한 후 나라에서 내린 것이다. 그녀는 일찍이 장수 현감 최경회를 모시는 몸이었다. 최경회는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전라우도의 의병장으로 큰 공을 세워 이듬해 경상우도 병마사가 되어 진주성으로 전임하였다. 이때에 논개도 그를 따라 진주로 이주 하였다.
그 해 6월에 왜군이 큰 세력을 휘몰아 진주성을 공격해 오자 격전 끝에 최경 회는 전사하고 성마저 함락되는 비극이 일어났다. 진주성에 입성한 왜군은 칠월칠석날 남강가에 촉석루에서 승전 축하연을 열었다. 이때에 논개는 나라에 충절을 다하고 최경회의 원수를 갚기를 맹세하고 왜군 연회에 들어가 왜장 모곡촌육조를 강가 바위로 유인하여 그를 끌어안고 푸른 강물에 투신하여 순국하였다.
그 후 나라에서는 그녀의 의거 장소인 강가 바위 위에 비석과 사당을 세워 그 녀의 충절을 기리게 되었다. 가냘픈 여자의 몸으로 충절을 다한 논개의 순국정신을 만고에 빛날 것이다.

1982년 10월
지은이 장수군수 박청준
쓴이    일송 한태석

주논개 생가 사적비

여기 주촌 마을은 의암 주논개가 부친 주달문과 모친 밀양박씨 사이에 태어 난 곳으로 이백여 평의 생가 터에는 우물과 유허비가 있었고 마을 입구에는 주논개낭 생장지 사적불망비가 있었다. 군민의 숙원인 생가 복원은 4백여년이 지나도록 이루지 못하다가 전두환 대통령의 특별하신 배려로 1986년에 착공하여 1986년에 완공되었다. 원 생가 터는 대곡 저수지 시설로 수몰되므로 같은 마을 둘레 내에 보존되어야 한다는 군민의 여망에 따라 남쪽으로 삼백여 미터 떨어진 곳에 부지 8천 3백 40명을 마련 복원하게 된 것이다. 이로써 의암 주논개의 충절이 선양되고 후세에 그 거룩한 얼이 전승되어 길이 숭모하게 되었다.
1972년 8월 일
장수군수 하광선
광주 이규진 서

의암 신안주씨 논개지려

부인의 성은 신안 朱씨요 이름은 論介이며 호는 義巖이다. 고려 때에 예부상서를 지낸 印長의 후예로서 할아버지는 통정대부 容一이며 장수현 임내면 주촌으로 이사온 후 자연을 벗 삼았고 아버지 達文은 훈장으로 가업을 이었다.
장안산에 빌어 생년 생월 생일 생시가 고루 개띠인 특이한 사주의 딸을 낳았으니 이 아이를 논개라 하였다.
자란 후 장수현감 崔慶會의 부인이 되었고 임진년에 왜란이 일어나자 부군 이 경상우병사로 배명받아 진주성으로 옮겨가자 부인도 따라갔다. 선조 26년(癸巳) 6.29일 진주성이 함락되면서 부군이 순국하자 울분을 참지 못하고 있던 논개는 그해 7.7일 왜군의 촉석루 잔치에 기생으로 가장 잠입하여 적장 毛谷村 六助를 위암에서 끌어안고 남강에 투신하므로써 장열하게 순절하였다.
후에 그 바위를 의암이라 일컫고 그 행실을 三綱錄에 올렸으며 주촌입구에 旌閭를 세웠던 것이 오랜 세월의 비바람에 망가졌으니 나는 님의 충절에 보답 하고자 정려(旌閭)를 다시 세우고 그 거룩한 뜻을 세워 길이 전하는 바이다.

1996년 6월
장수군수 김상두

충의공 최경회 현감 선덕 추모비명

조선왕조 1592년 (선조 25년) 4월 천인공노할 왜적의 침입으 로 임진국난을 당하여 나라의 운명이 백척간두에 달려 있을 때, 우국충정의 일념으로 분연히 일어서 나라를 지키다 순국한 최경회 현감은 1532년(중종 27) 전남 화순현 삼천리에서 아버지 천부와 어머니 순창임씨 사이에서 3남으로 태어났다.
공은 젊은 시절 송천 양응정과 고봉 기대승 선생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총명하고 기골이 장대하여 학식과 무예가 뛰어나 일찍이 신유년(명종 16)에 생원 진사에 통과하고 정묘년(명종 22)에 문과에 등제 벼슬길에 올랐다.
1574년(선조 7) 성균관 전적을 시작으로 옥구, 장수, 무장, 영암, 영해, 담양 등지에서 1590년(선조 23)까지 현감 또는 부사로 재직하였으며 그의 훌륭한 인품과 목민관으로서 선정을 베풀어 임지마다 공을 칭송하는 선적비가 세워졌다. 1590년(선조 23)에 모친상을 당하고 복중에 있을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상복을 입은 채 문흥헌의 추대로 의병장이 되어 화순, 능주를 중심으로 의병을 일으키어 골자로 징표를 삼은 의병부대를 창설하여 군사를 이끌고 남원을 거쳐 장수 땅에 이르러 장계 도장평에 장대를 설치하고 의병 8백여 명을 강군으로 조련을 시키었다. 이때에 장수현감 당시 민며느리 송사로 인연을 가졌던 논개와 재회의 기회를 갖게 되었으며, 논개의 기동성 있는 뒷바라지로 장수를 거 점으로 무주, 진안, 금산 등지의 왜적을 수없이 무찔러 재너머 지레로 퇴각시켰으며, 공민왕이 그린 청산백운도를 되찾고 언월도를 빼앗았다.
1592년(선조 25) 10월 5일 왜적 2만여명의 진주성 일차 공격이 시작되자 공이 영남지방도 우리나라 땅이라며 지역적 차별성을 극복하고 김시민 진주 판관을 돕기 위하여 정예된 의병을 이끌고 운봉, 함양, 산음 등지에서 뛰어난 전술로 왜적을 무찌르고 외곽인 지례, 거창 두 요충지대를 차단하여 적의 공격을 막아 호남과 경상우도를 전란으로부터 보전케 하고 전세를 승리로 이끄는 공을 세웠다. 공의 이러한 빛나는 전공을 선조께서 가상하게 여겨 1593년 4월 에 경상우병사로 제수를 하게 되었다.
왜적은 다시 1593년(선조 26) 6월 19일 일차 진주성 싸움의 패전을 설욕하 려고 십만 대군을 집결, 진주성을 겹겹으로 에워싸고, 2차 진주성 공격을 시작 하였다.
최 병사는 창의사 김천일과 더불어 충의를 맹서하고 성을 사수하고자 진주성으로 입성하였다. 이때에 논개는 낭군을 따라 풍천에서 진주에 도착하여 진주성 싸움에 참전하였으며 군관민 6만여 명이 아흐레 동안 밤낮 한 덩어리가 되어 필사적으로 왜적과 싸웠으나 조총이란 신무기와 중과부적으로 끝내 성은 함락당하여 왜적의 난입으로 목불인경의 참상이 벌어졌다. 최 병사는 김천일, 고종후와 같이 남장대에 모여 성을 지키지 못한 자격지심에 자결을 결심하고 임금에게 북향 사배한 후, 절명시로 촉석루 위 삼 장사는/술 한 잔을 들고 웃으며 남강을 가리키노라/남강물 도도히 흘러가노니/저 물이 마르지 않는 한 이 혼도 죽지 않으리.'라는 시한 수를 남기고 남강에 투신 순국하였다. 이에 조정 에서는 이를 가상히 여겨 좌찬성을 증직하고 충의공으로 시호를 내렸다.
논개는 난중에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았으나 성이 무너진 처참한 상황에서 낭군과 나라의 원수를 갚을 것을 결심하고 칠월칠석날 기생으로 가장, 왜적 승전연에 참석, 왜장 모곡촌육조를 의암으로 유인하여 강하게 나꾸어 챈 다음 남강에 투신, 호국의 연신으로 산화하였다. 최 현감이 무장현감으로 전임 후 1580년경에 장수 재직 시 선정을 베푼 공 덕을 기리기 위하여 장수 현청 앞에 군민들이 선덕비를 세웠으니 세월에 마멸 되어 희미하게 사라져 감을 안타깝게 여겨 이곳에 논개 생가를 확장 이전하면서 옛 선덕비문을 더듬어 후세에 길이 전하고자 추모비를 세운다.

서기 2000년 9월 장수군수 김상두 근립
한국문협 장수지부장 고두영 근찬
유도회 청년부장 양기홍 근서

의랑루기

백두대간의 정기서린 호남 정맥의 종산인 장안산 자락은 동양성리학의 시조라 이르는 주부자 희의 후예인 주달문과 밀양박씨 사이에서 무남독녀로 태어난 주논개가 어릴 적 또래들과 어울리어 새를 쫓고 찾아 노닐던 산자수명한 터전이다. 유학의 비조인 공자의 가르침에 살신성인 희생취의는 자신을 죽이고 버려서 인의를 이룩함이 사람이 취하여야 할 최상의 도리라 하였다. 임진왜란의 국난에 처하여 남편따라 진주성 싸움에 참가했던 주 낭자는 자신을 죽여서 인의를 취한 최상의 길을 택하여 열아홉의 꽃다운 나이에 꽃잎같이 떨어져 간 만인이 우러러 받드는 호국의 성녀가 되었다.
낭자는 성이 무너지고 남편이 순절하자 날카로운 복수심에 불타 단독결심, 단독결행의 서러운 이름을 뒤집어쓰고 죽음으로 세상에 태어나 4백여 년 외로 운 귀혼으로 구천에 떠돌아 다녔으며 이곳 생가마저 돌보는 이 없이 폐허로 방 치되어 버렸다. 마침내 8.15 광복을 맞으며 장수골 사람들의 오랜 숙원인 의암사를 세우고 생가 복원도 하였다. 그러나 복원된 생가가 낭자를 상징하기에는 너무 빈약하고 초라하였다.
1996년 민의에 의하여 피선된 김상두 군수는 고장 발전의 과제로 군민소득 증대와 삼절오의(三節五義) 으뜸인 주 낭자의 생가 이전 복원을 착수하여 불철 주야 동부서주 온 정성을 다 바쳐 2만여평의 부지를 확보하고 5년여의 장기 계획으로 관계요로의 많은 지원을 받아 낭장의 행적에 걸맞은 생가, 석상, 기념 관, 의랑두 등을 2천년 9월 29일 그 준공을 보게 되었다. 특히 유종근 도지사는 낭자를 전북의 상징적인 인물로 부상시키는 데 공감대를 갖고 예산지원을 해 주었으며, 정세균 국회의원도 국가적 차원의 여인상으로 부각이 되도록 많은 국고 보조를 해 주어 큰 받침이 되었다. 오늘의 준공이 있기까지 장수군민과 함께한 모든 분들의 뜻과 힘을 모아 주 낭자의 영원한 안식처이며 얼 선양의 추모현장이 되었음을 제명(題銘)한다.

죽음에서 태어난
그 이름이여!
흔적 없이
소리 없이 임 가신 긴 여울목
고향집 부모 생애 그 모두를
슬픈 물결에 묻어 두고
수모와 모멸과 천시를 넘나들던
서러운 이름이여!

햇빛에 떠오르면 정사가 되고
달빛에 잠기면 야사가 되거늘
햇빛 달빛도 비켜서버린
외로운 이름이여!
이젠
꽃빛 불빛으로
민중의 가슴속 화석으로 새겨진
의랑루에 불사조로 살아난
구원의 여신
거룩한 이름이여
그 이름이여!

2000년 9월 29일 시인 효산 고두영 글 짓고
서예인 문정 주재호 글씨 씀

양승호공적기념비(동촌 이수영 글씨)

雲山 梁承好 회장은 재일 한국 동포들의 독창적인 協立企業을 설립 운수, 창고업 등 으로 튼튼한 경제적 기반을 구축 하였다. 그리하여 1972년부터 재일 福岡顯民團顧問과 支團長 商銀理事 등에 선임되어 교포들의 생활을 지원. 지위향상에 큰 공헌을 하였다.
또한 1995년에는 임진왜란시 진주성 싸움에서 순절한 崔慶會 장군의 부실인 朱論介 님의 추모회를 설립하여 매년 그 순국정신을 기리는 행사를 실천해 왔다.
특히 장수군민의 숙원인 義嚴朱論介精神宣楊會 법인 출범에 즈음하여 많은 성원을 하였으므로 功續記念碑를 세우다.

서기 2000년 9월 29일
長水郡守 金祥斗 謹立

만해 한용운 시비(산민 이용 글씨)

論介의 愛人되어서 그의 廟에

날과 밤으로 흐르고 흐르는 남강(南江)은 가지 않습니다.
바람과 비에 우두커니 섰는 촉석루(石樓)는 살 같은 광음(光陰)을 따라서 달음질칩니다.
논개(論介)여, 나에게 움음과 웃음을 동시(同時)에 주는 사랑하는 논개여.
그대는 조선의 무덤 가운데 피었던 좋은 꽃의 하나이다. 그래서 그 향기는 썩지 않는다.

천추(千秋)에 죽지 안는 논개(論介)여
하루도 삶수 업는 논개(論介)여
그대를 사랑하는 나의 마음이 얼마나 질겨으며 얼마나 슯흐것는가
나는 우슴이 제워서 눈물이 되고 눈물이 제워서 우슴이 됨니다.

용서(容恕)하여요 사랑하는 오오 논개(論介)여

이기철 시비

한 꽃송이 - 논개에게 바침 -
여향 이기철

누가 나에게 선물한 큰 책이 여기 있다.
누가 나에게 선물한 장엄사서(史書)가 여 기 있다.
페이지를 넘기는 손가락마다 향기가 묻어 난다.

꽃수풀에 앉아 그대라는 역사책을 읽고 푸른 풀밭에 앉아 그대라는 시집을 읽는다.
순금 햇살로 쓴 하늘 원고지의 글자는 읽으면 읽을수록 선율 고운 음악이 된다.

그대 손마디의 은가락지는 목숨의 경첩이 되고 그대 서리 같은 마음은 아침 이슬이 되어 강물에 던진 몸
사랑을 낳고 역사에 바친 몸 민족을 안았나니 그대 이름은 이미 천년의 역사가 되었나니

그대 아니라면 오늘 우리가 걷는 이 꽃 수풀이 무엇이겠는가
한번 부르면 애인이 되고 또 한 번 부르면 나라가 되는 그대 이름 그대 간 길 따라 오늘은 남도 삼 백리를 발목이 시도록 걷는다.

주촌 민속마을 (논개 생가마을)

주촌 민속마을은 28가구가 오순도순 살고 있으며 마을 내에는 우리 조상들의 진솔한 삶이 담긴 물레방아, 연자방아, 디딜방아, 모정 등 우리 고유의 전통시설이 있다. 와서 보면 누구나 살고 싶은 마음이 드는 농촌의 전형적인 어메니티(Amenity)가 실현된 마을로 논개생가와 연계되어 우리 군의 새로운 관광지로 부각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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