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의암주논개정신선양회 홈페이지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메인 메뉴


콘텐츠

논개 소개
논개 관련 유적지
논개 유적지 진주지역
논개지문에 새겨진 ‘의암사적비명’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4.11.20
페이스북 트위터 카카오스토리 네이버 링크 복사

위치
진주성 남강가
지정
경남유형문화재 제353호
이 비는 임진왜란(壬辰倭亂) 당시 제2차 진주성전투(1593년)에서 성이 함락되어 7만의 군·관·민이 순절(殉節)하자, 의암(義巖)에서 왜장(倭將)을 끌어안고 강물에 뛰어든 논개(論介, 1574~1593)의 업적을 기록한 비이다. 논개에 관한 이야기는 진주 사람들의 입으로 전해지다가 1620년 경 유몽인(柳夢寅, 1559~1623)이 쓴 어우야담(於于野談)에 실려 기록으로 남게 되었다. 그리고 이 무렵 진주 사람들은 그녀가 순국한 바위에다 ‘義巖’이라는 글자를 새겨 놓았다. 그러나 지역민들의 이러한 노력과 달리 임진왜란 때의 충신·효자·열녀를 선정해 편찬한 동국신속삼강행실도??(東國新續三綱行實圖)에는 그녀의 사적이 빠져있다. 이는 그녀가 천한 기생 출신이기 때문에 사람들의 모범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한 편찬자들의 편견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진주 지역 사람들은 진주성이 함락된 날에 제단(祭壇)을 마련하여 그녀의 (魂)을 달래는 한편, 그녀의 의로운 뜻을 인정해 줄 것을 국가에 요구하였다. 그리고 1722년(경종 2)에 명암 정식이 어우야담의 내용을 바탕으로 비문을 지어 이 사적비를 세웠다. 또 1741년(영조 17)에는 경상우병사(慶尙右兵使) 남덕하(南德夏)가 왕의 특명을 받아 비각(碑閣)을 세우고 ‘의기논개지문(義妓論介之門)’이라는 현판을 걸었다. 이로써 논개는 국가로부터 ‘의로운 기생’(義妓)으로 그 명예를 인정받았다. 이 비는 임진왜란 당시 진주성의 상황이나 논개의 순국 사적을 상세히 전하고 있다.
비문

류어우(柳於于) 몽인(夢寅) 야담에 말하기를 논개는 진주관기였다. 그때는 만력 계사년에 김천일 등 창의 장수들이 진주성에 들어가서 일본군과 항쟁하였다.
성이 무너지고 군사가 흩어지니 백성이 다 죽었다. 논개는 치장 성복하고 촉석루 아래 큰 바위에 서 있었다. 그 아래는 만길이나 되는 강심으로 빠질 수 있는 곳이다.
왜군의 무리는 그를 보고 기뻐하였다. 그러나 감히 가까이 오지 못하였다. 한 왜인이 바로 들어갔다. 논개는 웃으면서 맞이하였다. 왜장이 달래어 끌어내려 하자 논개는 앞으로 걸어 나가 왜장을 끌어안고 몸을 날려 강심으로 뛰어들어 같이 죽었다.
임진왜란에 관기의 몸으로 왜적을 만나 욕을 보지 않으려고 죽은 자를 다 기록하지 못하였고 어찌 논개 하나에 그치랴. 다 그 이름을 잊었으니 저 관기들을 음란한 창녀라고 하여 정렬이라 칭송함이 옳지 않다고 하나 죽음에 가기를 옛집에 돌아가듯 하였으니 썩지 아니하였고 적에게 맘을 뺏기지 아니하였으니 또한 성스럽게 되어가는 중의 하나이다. 참기 어려우나 나라를 등지지 않고 적을 따르지 않는 것도 타의 아닌 충이니 그 기특함과 슬픔이다.

그 바위 홀로 섰고
그 여자 우뚝 섰네
여자가 이 바위 아니면
어찌 죽을 곳을 찾았으리
바위가 이 여자 아니면
어찌 의로운 소리 들을소냐
한강의 외로운 바위가
만고에 꽃다운 이름 얻었네

승정 기원후 95년 임인 4월 일입
<서기 1722년 (경종 2년)>

`

카피라이터

LOGIN
ID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