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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개 소개
논개 관련 유적지
논개 유적지 진주지역
의랑 논개의 비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4.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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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
진주성내 의기사
이 비석은 논개가 순국한지 361년이 지나 1954년 의기창열회에서 진주 촉석루 서편에 있는 의기사 정원에다 세운 것이다. 이 비문에서 새롭게 밝혀진 것은 진주에서 처음으로 논개가 장수군 계내면 주촌 태생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논개의 순국사실을 만 사람의 노래와 춤으로 보답 받을 위대한 여왕으로 추앙 찬양한 점이다.
비문

의랑 논개의 비(진주 의기사)하나인 것이 동시에 둘일 수 없는 것이면서 민족의 가슴팍에 살아 있는 논개의 이름은 백도 천도 만도 넘는다. 마지막 시각까지 원수와 더불어 노래하며 춤추었고 그를 껴안고 죽어간 입술이 앵두보다 붉고 서리 맺힌 눈썹은 반달보다 고왔던 것은 한갓 기생으로서가 아니라 민족의 가슴에 영원하도록 남는 처녀의 자태였으며 만 사람의 노래와 춤으로 보답 받을 위대한 여왕으로 서이다. 민족 역사의 산과 들에 높고 낮은 권세의 왕들 무덤이 오늘날 우리와 상관이 없으면서 한 줄기 푸른 물과 한 덩이 하얀 바위가 삼백예순 해를 지날수록 민족의 가슴 깊이 한결 푸르고 고운 까닭이라. 그를 사랑하고 숭모한 뜻이랴, 썩은 벼슬아치들이 외람되어 높은 자리를 차지하여 민족을 고달피고 나라를 망친 허물과 표독한 오랑캐의 무리가 어진 민족을 노략하므로 식어진 어미의 젖꼭지에 매달려 애기들을 울린 저주를 넘어 죽어서 오히려 사는 이치와 하나를 바쳐 모두를 얻는 도리를 증명한 그를 보면 그만이다. 피란 매양 물보다 진한 것이 아니어 무고히 흘려진 그 옛날 민족의 피는 어즈버 진주성터의 풀 거름이 되고 말아도 불로한 처녀 논개의 푸른 머리카락을 빗겨 남 가람의 천추의 푸르러 굽이치며 흐름을 보라. 애오라지 민족의 처녀에게 드리고픔은 민족의 사랑만을 강물 따라 흐르는 것이 아니기에 아아 어느 날 조국의 다사로운 금잔디 밭으로 물옷 벗어들고 거닐어 오실 당신을 위하여 돌 하나 세운다. 논개의 사연으로 의낭 논개가 나신 곳은 전라북도 장수군 계내면 대곡 주촌리이니 성은 주(朱)씨이다. 장수군 장수면 큰길가에 있는 논개 비각은 장수현감 정주석이 세운 비석을 미일전쟁 때에 일본 경찰이 땅에 묻었던 것인데 을유년 팔월 해방 뒤에 장수군민의 힘으로 파서 모신 것이다. 임진왜란 당년 오월 초 초사흗날 서울을 빼앗기고 유월 열 사흗날에는 평양이 떨어졌으니 진주통판 김시민 등의 사수분전 아래 진주성만이 흘연한 호남의 방패가 되었다. 다음해 선조 26년 계사 6월에 6만 왜병이 아연 진주성을 세 겹으로 둘러싸니 창의사 김천일, 경상우병사 최경회, 충청병사 황진 등 삼 장수를 비롯한 결사의거의 장병 육천이 밤낮 여드레 동안을 꼬박 혈투했으나 6월 29일 드디어 진주성은 무너졌다. 순국자의 피에 물들어 흐르는 남강은 불그레하고 한 마리의 개와 닭, 소와 말이 성할 리 없이 학살당한 성민의 죽음으로 고랑과 샘들이 모조리 메워졌다. 날이 새며 적들의 만흥은 더욱 도도하여 촉석루 위에 벌어진 잔치가 한창 난만할 뿐이다. 이때 다락 밑 강 언덕에 외딴 넓적바위 위에 서는 한 사람의 꽃다운 여인 홀로 춤추며 노래하고 있다. 만취한 적장 모곡촌(毛谷村) 일설 석종로(石宗老 )가 달려 내려가더니 여인과 더불어 얼싸안고 환장처럼 즐기는 것이었다. 마침내 여인은 적장을 껴안고 떨어지고 만다. 그의 열 손가락은 마디마디 반지를 끼고 있었으니 이 분이 곧 의기 논개이다. 이 비를 세운 뜻은 한 해인 계사년 논개의낭 순국하신 육갑을 기념하여 비롯된 것이다.

단기 4287년 갑오 10월 29일 의기 창열회 삼가 세움
글 지은이 설창수
글씨 쓴 이 오재봉
일 주장 김진숙, 임한산, 박봉래
돌 일한 이 박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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