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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수 사과만큼 붉은 충절 '논개 이야기'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4.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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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개에 대한 기록은 간략하다. ‘진주의 관기이며 왜장을 안고 순국했다.’, 유몽인의 <어우야담>이 전하는 단 한문장이다. 이런 미미한 기록에도 진주와 장수, 두 지역에서 논개를 기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의 조상 할머니, 논개의 이야기를 들으러 장수로 간다.

◆우리가 몰랐던 이야기

장수에서 듣는 ‘논개 이야기’는 충격적이다. 논개의 성은 ‘주’씨이고, 현감의 후처가 된 몰락한 양반가의 딸이란다. 어느 기록엔 기녀라 했고, 어느 기록엔 기녀로 가장했다고 봤다. 그런데 여기에선 양반이란다. 처음엔 ‘너무 오버하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지만 이야기를 자세히 듣다보면 수긍이 가는 면이 꽤 있다.

그동안 알고 지낸 세월 탓인지 모든 내용이 전적으로 믿어지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정황과 근거를 들어가며 이야기를 들려주는 문화해설사의 설명에 저절로 집중하게 된다. 논개의 충절에 감사하게 되고 억울한 속사정을 조금은 위로하고 싶은 마음이 든다.

‘논개는 기생이다?’ 이 기록 때문에 논개는 임진왜란에서 엄청난 공을 세웠음에도 ‘관기의 일’로 일축되고 외면당했다.


주촌마을


논개는 주씨다. 원래 양반가의 딸이었지만 아버지 주달문이 사망하고 집안이 어려워지자 삼촌이 다섯살짜리 어린 논개를 민며느리로 팔았다. 어머니는 이 사실을 알고 논개를 피신시켰지만 결국 계약 위반으로 잡혀가 현감 앞에 가서 재판을 받게 된다.

이때 논개와 논개 어머니를 구명한 현감이 바로 최경회다. 이를 계기로 생활이 어려웠던 논개와 그 어머니가 최경회의 집에서 허드렛일을 하며 살게 된다. 이후 18살이 된 논개는 부인을 잃은 최경회의 후처가 된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최경회는 의병장으로 나섰다. 그는 1차 진주성 싸움에서 승리를 거뒀으나 이후 진주성이 함락되고 남강에 투신한다. 왜군은 이 승리를 자축하기 위해 촉석루에서 주연을 벌였다. 논개는 기생으로 위장해 이곳에 참석한다. 그녀는 열손가락 마디마디에 반지를 낀 채 왜장 게야무라 로쿠스케를 끌어안고 남강에 몸을 던진다.

성리학의 나라였던 조선은 ‘기생의 일’이라 하여 대수롭지 않게 여겼지만, 논개의 순국은 커다란 의미를 지닌다. 이 일을 계기로 왜군의 기세가 꺾여 이후 전쟁의 판도를 바꾸는 데 일조했다. 그녀의 공이 컸다는 것은 이후 일제강점기 때, ‘주논개의 고장’인 장수 일대의 주씨를 모조리 말살하려고 했던 일제의 만행만 봐도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조선은 논개에 대해 관심조차 갖지 않았다. 여자이며 게다가 관기라는 편견 속에서 잊혀진 인물이었다. 그렇게 잠들어 있던 논개는 순국 후 100년도 더 지나서 조금씩 거론되기 시작했다. 논개가 왜장을 끌어안고 산화한 때가 1593년이지만 1721년이 돼서야 경상 우병사 최진한이 국가에 포상을 건의했다. 그렇게 조금씩 논개의 일은 세상에 드러나게 된다.

논개사당과 의암호
논개사당 의암사


◆주촌마을과 논개 사당

의암은 논개가 왜장을 껴안고 남강에 뛰어든 바위다. 의암은 진주에 있는데 의암호는 장수에 있고, 생가는 주촌마을에 사당은 의암호에 있다. 하여 논개사당의 이름은 ‘의암사’다. 이곳에서 매년 음력 9월3일에 주논개제가 행해진다.

주촌은 주씨의 마을, 바로 주씨 집성촌이었다. 주논개의 아버지였던 주달문이 이곳에 서당을 세우고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마을이 형성됐다고 한다. 이때 논개가 태어나 13세까지 성장했기 때문에 그녀가 사용하던 우물과 생가터가 남아 있다. 논개기념관에는 논개의 업적을 이해하기 쉽게 설명해 놓았고, 연못가의 단아정은 이름처럼 단아한 아름다움이 느껴진다.

생가를 지나 언덕을 오르면 주촌마을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작은 정자가 있다. 가만히 마을을 보면 여긴 딴 데서 봤던 한옥마을과는 느낌이 조금 다르다. 지붕 위에 기와·초가가 아닌 얇은 돌판이나 나무가 올라가 있다.

바로 너와집과 굴피집이다. 마을길을 걸으면 메밀꽃, 해바라기, 코스모스 등 꽃길이 이어지고 개울 끝에 물레방앗간도 정답다. 마을이 예뻐서 드라마 <아가씨를 부탁해>에도 나왔다. 논개 생가를 포함해 볼거리, 할거리가 많은 곳이다.

장수 사람들의 논개에 대한 존경과 애정은 남다르다. 1846년 헌종 때 현감 정주석은 논개생향비를 건립했는데, 이후 일제에 의해 파괴될 위기에 처하자 마을 사람들이 이것을 땅속에 파묻어 보존했다.

지금 논개사당에 있는 비가 바로 그때 숨겨 놓았던 것으로 자세히 보면 찍힌 자국이 보인다. 논개사당에서 영정까지는 3개의 계단을 오른다. 사당에 올라 잠시 묵념을 하고 내려오기 전에 뒤를 돌아 멀리 한번 바라본다.

의암호와 어우러진 앞산의 실루엣이 시원하다. 장수는 400~600m 고지에 있어서 특유의 청량감이 있다. 높은 지대에서 조금 더 올라왔으니 큰 심호흡과 함께 탁 트인 의암호의 경치를 만끽해볼 만하다.

논개생가


◆의암호 한우랑사과랑 축제

의암호에서는 해마다 재미있는 일이 벌어진다. 장수의 대표축제인 ‘한우랑사과랑 축제’다. 장수사과의 대표 품종은 ‘홍로’로 출하시기가 가장 빠르다. 이는 추석 차례상에 놓인다 하여 ‘추석사과’로 불린다.

한편 장수 인구는 2만4000명인데 비해 소는 3만2000마리가량 사육되고 있어 ‘사람보다 소가 많은 곳’으로도 유명하다. 장수 사람들은 사과와 한우에 대한 열심이 남달라서 ‘사과시험포’와 ‘장수한우지방공사’를 별도로 운영한다.

논개생장향 수명비


이곳에서 가장 좋은 사과와 한우를 생산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이 두가지를 하나로 묶어 벌이는 잔치가 바로 ‘한우랑사과랑축제’다. 벌써 8회째를 맞이하는 이 축제는 단순히 놀고 즐기는 것이 아니라 좋은 한우와 사과를 보다 저렴한 가격에 구입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인기다. 물론 이벤트도 풍성하고 이에 따른 선물도 넉넉하다.

특히 ‘곤포나르기’ 같은 힘자랑 이벤트가 사람들에게 큰 인기를 얻고 있다. 그렇지, 몸에 좋은 사과와 한우를 먹었으니 힘쓰는 건 당연한 일이겠다. 미리 예약한 사과나무에서 사과 따기 체험도 하고, 한우와 사과 품평회, 요리 경연대회 등 구미를 당기는 행사에 참여해도 좋고, 논개사당 아래 마련된 캠핑장에서 하룻밤 지내보는 것도 즐거운 경험이겠다.

이제 곧 추석이다. 서늘한 바람 불어오는 장수 청정지역에 가서 논개의 붉은 충절도 기리고, 한우랑 사과랑 맛보며 몸에 좋은 ‘레드 푸드’의 에너지에 빠져 보는 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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